アンスタ

카오카나, 백 년의 랑데부 1

2018. 6. 2. 03:59

치키타구구AU

하카제 카오루, 신카이 카나타








1. 물의 감옥



소년은 동굴의 출구 근처에 섰다. 경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동굴 밖은 바다의 한가운데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바닷물은 동굴 안으로는 들이닥치지 않는다. 동굴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해수의 흐름을 따라 물고기 떼들이 유영하는 풍경은 몇 번을 보아도 비현실적이었다. 사실 자신은 이 바다에서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이미 죽어서 넋만이 구천을 떠도는 것 아닐까? 그러나 둘 다 아님을, 하카제 카오루는 알고 있다. 세상에 얼마나 기묘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지. 그것을 믿지 않을지는 자유이지만 어쨌든 일은 발생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에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조용히 손을 뻗어 경계의 표면을 어루만지자 편편한 수면이 닿았다. 물의 차가움이 살갗에 스미어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고 있자, 등 뒤에서 밝은 빛이 다가왔다. 빛의 눈부심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핏 돌리자 남자가 초롱아귀가 담긴 어항을 들고 서있었다. 올리브색 눈동자가 물기 어린 보석처럼 반짝였다. 비늘이 돋아난 다리가 아직 아픈지 절뚝거리며 얼굴엔 옅은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카오루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곧 밝게 웃었다. 상냥해보이는 미소. 그것이 심기에 거슬려 카오루는 애써 동굴 바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깨 너머로 빛이 계속 어른거렸지만 남자는 그이상 카오루의 신경을 끌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물러나지도 않았다. 정적. 기름이 타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등불과, 산호에서 뿜어져나와 해초향을 머금은 상쾌한 산소. 벌써 며칠이나 흘렀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대기大氣, 혹은 대기待機.


빛이 있지만, 햇빛은 아니다. 산소는 있지만, 지상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카오루는 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따사로운 볕과 흙내음 나는 공기가 그리웠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대답이 필요하다. 남자는 카오루에게 선택하라고 말했지만, 선택지가 하나 뿐인 선택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 바다를 벗어나 땅을 밟을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이 동굴은 아무리 아름답고 아늑해도 바다로 둘러싸인 감옥일 뿐. 상냥한 얼굴을 하고 협박이나 다름없는 요구를 하다니. 아니,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하나 더 있긴 했다. 바로 이 경계를 스스로의 걸음으로 넘어서는 것. 그렇게 하면 바다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것이 먼저일지 수압에 압사하는 것이 먼저일지.


벌써 『정오』네요.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어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가 별로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카오루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카오루를, 남자는 잠시간 사랑스러운듯이 내려다본다. 아이를 보는 어머니처럼. 상냥한 눈빛으로.


『물고기』를 『데려』올게요. 배고파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다리부터 동굴을 나선다. 바닷물에 다리가 닿자 그가 걸친 천이 다리에 착 달라붙더니 이윽고 그 위에서 무수한 비늘과 지느러미가 돋아나, 그의 두 다리는 어느새 거대한 물고기의 꼬리처럼 변했다. 카오루가 말을 걸 틈도 없이 그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유영하는 지느러미의 뒷모습을, 재빠르게 멀어지는 그 모습을 못박힌 듯 바라보다가 점이 되어 바다에 녹아들었을 때에서야 카오루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인어는, 아주 보기 드문 요괴다. 신이 영생을 부여한 세 종족 중 하나로, 그들 중 인어는 바다를 관장하므로 예로부터 뱃사람들은 인어를 보면 아주 큰 행운이 오거나 아주 끔찍한 재앙이 온다고 믿었다. 흉과 복 중 무엇을 내릴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어를 귀하게 여기며 경외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인어를 포함해 세 종족을 본 사람의 경험담은 세기를 꼽을 정도로 드물다. 이제는 실존 여부가 불투명하고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전설 취급이나 받게 된 존재인 것이다.


살아돌아간다면, 인어를 본 소년이라고 후대에 전설처럼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전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애초에 이런 이야기, 누구에게 한들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아도 사건은 발생하고, 자신은 그 흐름에 거스를 수 없다.


히카제 카오루는 인어의 인질이 되었다. 



*



예감은 없었다. 전조도 없었다. 허니 비극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저 지독한 불행이었을 뿐.


지난 밤부터 시작된 폭풍우는 새벽이 되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선원들은 자지 않고 꼬박 거친 풍랑을 견뎠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거칠게 날뛰는 바다 앞에 수십 년을 바다에서 버텨온 뛰어난 항해술도 소용이 없었다. 경로를 한참 이탈할 끝에 배는 결국 녹초에 난파되었다. 일찍이 구명정을 꺼내고 탈출을 준비했지만 거친 바다는 거대한 함선에서 사람들이 기어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냉큼 높다란 해일로 작은 선박들을 덮쳤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 가문의 존망, 수많은 금은보화가 그 날 바다의 물거품처럼 녹아 없어졌다. 그 바다에서, 하카제 카오루는 의식을 잊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저 검은 벽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높은 파도 앞에서 이렇게까지 파도가 높아질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조차 바다가 두렵지 않았다. 바다의 신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을 뿐. 그렇게 카오루의 첫 항해는 최악의 형태로 끝을 맺었다.


……눈을 떴을 때, 카오루는 자신이 죽어서 사후 세계에 왔다고 생각했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강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죽은 뒤에 눈을 떴으니 사후 세계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자死者에게도 맥박이 있나? 심장에 피가 돌고 뺨에 온기가 남아있나? 게다가 몸 구석구석 상처에 약이 발려져 있었다. 카오루는 서서히 이곳이 사후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았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인어가 그를 살렸다.


죽지 않았으니 최악만은 면했다고 보아야 할까. 자신을 제하고 그 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을지 모르지만, 카오루는 어렴풋이 생존자는 거의 없으리라 짐작했다. 본디 자신도 그 풍랑에 휩싸여 죽어야 했던 것을, 인어가 살린 것에 불과하니까.


처음에는 해안에 사는 사람이 저를 살린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동굴은 심해 한가운데 있었고, 그가 인간이 아님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뭍에서는 두 다리로 섰고 물에서는 지느러미가 돋아난 하반신을 가졌다. 틀림없이 인어엿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존귀한 요괴를 만난 것에 놀라워 할 틈도 없이, 아니 오히려 구명의 주체가 불가사의하고 신적인 존재였기에 카오루는 왜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원망했다. 형과 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스쳤다. 울컥 스미는 눈물에는 살려준 것과, 자신밖에 살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은원이 뒤엉켜 있었다. 어리석은 화풀이였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막 깨어난 카오루는 상실에 대한 비통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막 상선에 타는 것을 허락 받은,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성동成童에 불과했다. 연약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 순간의 카오루가 그랬다. 인어는 그의 분노와 슬픔 앞에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밀려오는 잔혹한 현실 앞에 기력을 잃은 소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손끝에 맺힌 눈물을 혀로 낼름 핥더니 못먹을 것을 입에 댔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쓰』네요.”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느라 지쳤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조가 어쩐지 매우 기쁘고 상기되어 있었던 것만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뒤로 인어는 황송하게도 손수, 상당히 극진히 자신이 살려낸 소년을 보살폈다. 기력이 쇠하여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자 비록 해산물 뿐이었지만 귀한 바다 고기의 살과 알을 발라 해초와 함께 푹 끓여 어죽을 만들어 먹이고, 붉고 걸죽하고 비리면서도 달큰한 정체불명의 액체를 보양식이라며 마시게 했다. 과연 제법 효과가 있어서 카오루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로 기력을 되찾았다.


동굴 안을 돌아다닐 때 인어의 꼬리는 두 다리로 변했다. 카오루는 동화처럼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지 않아도 인어가 자유자재로 두 다리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했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그는 맨몸이었지만 다리가 생기자 비늘가죽과 비슷한 색깔의 천이 하반신을 감싸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역시 요괴의 요술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에 젖지 않는 천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다리에는 피부 위에 비늘이 조금 남아서, 표피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동굴 안에서는 걷는 게 편하다고 했지만, 그 말고 달리 정작 그는 두 다리로 땅을 짚을 때마다 무척 아프고 불편해 보였다. 그의 살결은 갓난아이처럼 너무 부드럽고 연약해서 동굴의 딱딱한 바닥을 밟고 있노라면 금세 피부가 새빨개지고 짓물렀다. 카오루는 자신의 상처를 흔적도 없이 낫게 만든 연고를 바르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발을 돌보지 않았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동안 차차 경계는 풀렸고, 새삼스레 그가 자신의 은인이라는 점을 되새긴 카오루는 어느새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새빨개진 발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빛을 인어는 곧 눈치챘는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모습』을 하는 건 『오랜만』이니까요.

하지만 그 말은 걱정을 덜 만한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인어는 손을 뻗었다. 새하얗고 매끈한, 백옥처럼 투명한 손이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은 소년의 정수리를 그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곧, 『익숙』해질 거랍니다? 『걱정』해주다니, 『상냥』한 아이네요♪


고개를 살풋 숙여서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은쟁반에 비취를 굴리는 것처럼 청아했다. 인어의 노래는 사람을 홀린다던데. 카오루가 멍하니 인어를 올려다보다가… 이름. 그들이 며칠이 지나도록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먼저 전하자 인어는 잠시 말이 없더니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웃으며 대꾸했다. 그 뿐이었다. 인어에게는 상대의 이름을 받으면 자신의 이름도 전해주어야 한다는 예절은 없는 걸까. 그럼, 인어 님은? 카오루가 묻자 인어는 막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아, 그렇죠. 저도 말해야하는 거였죠.


저는… 신카이랍니다. 『깊은 바다ふかい うみ』라고 할 때의 신카이. 바다에 사는 그와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오히려 성의가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 뿐? 카오루가 지긋이 쳐다보자 신카이는 이내 싱긋 웃었다. 님이라니, 그렇게 거창한 존대 필요는 없어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저도 그대를 카오루라 부를 게요. 요괴에게는 성과 이름의 구분이 없는 걸까. 어쩌면 그들의 근간은 가문이나 성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기에 이름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신카이의 입이 다시는 열리지 않았기에, 카오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보다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상을 막 부를 수는 없기에 절충한 호칭을 쓰며. 알겠어 신카이 씨.


두 사람이 통성명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오루는 조심스레 육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은 아니었다. 카오루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고, 동굴의 생활이 평생토록 지속하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당연히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신카이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곧 평소의 평온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카오루는 순식간에 변화를 넘나드는 그의 얼굴이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렇지요. 카오루는 『제물』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신카이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 앞에서 카오루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신카이가 말하는 ‘제물’이란 과거의 악습인 인신공양을 말하는 것일 테다. 지금도 가뭄, 홍수, 해일, 지진 등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지재변이 일어나면 제사를 지낸다. 카오루의 집안도 출항을 하기 전이면 집 한 켠에 지어둔 제단에서 제를 올리곤 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인신공양을 하는 풍습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사라졌다. 제물은 어디까지나 그 해의 수확물이나 짐승으로 대신한다. 오지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부락에서는 간간히 인신공양의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다고도 전해지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처럼 들려오는 이야기니 믿을 바는 못된다. 어느 먼 옛날엔, 제물이 되어 이 동굴에서 살아야만 했던 아이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카오루는, 왜 배를 타고 있었던 거죠? 아이는 배에 타지 않는 것이 『원칙』 아니던가요? 문득 신카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이는 배를 타면 안 된다니,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카오루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원칙은 없는걸.


그렇다, 그런 원칙은 없다.

…하지만 옛날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항해술과 선박술이 발달한 지금도 이렇게 배가 난파되는 사고가 일어나는데, 옛날의 항해는 더 위험하고 더 험궂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배에서 어린아이는 밥만 축내는 빈약한 노동력에 불과했을 터이니, 뱃사람 전체의 생존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더 승선시키지 않았겠지. 풍습이나 터부란 것은 결국 나름 타당한 이유에 기반한 활동이 고착화 되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잊게 됨으로써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므로. 


정말…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나보군요. 『원칙』이 없던 것이 될 만큼. 신카이는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카오루는 진작 신카이의 질문이 말을 돌리기 위한 핑계임을 눈치챘지만, 도리어 그는 자신의 대답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은 것 같았다.


신카이는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 눈을 빛내며 카오루에게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얼굴, 두 뺨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허리를 기울여 카오루와 시선을 맞추고 그의 양손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잡았다. 손등에 닿는 그의 손바닥은 항상 물에서 지내는 사람답지 않게 의외로 따스했다. 얼굴이 바싹 가까워지자 카오루는 긴장되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카오루, 저와 「백년」을 해주겠어요?”



*



“그렇다면 카오루, 저와 『백년』을 해주겠어요?”
“백…년?”

긴장한 카오루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백년. 낯선 단어에 눈을 깜빡였지만 카나타는 한결 같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오루는 세 종족, 『영생』을 사는 요괴가 『식인』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식인요괴. 카오루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고, 순간 오싹해져서 제 손을 잡은 신카이의 손을 쳐냈다. 신카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와 평소와 다름 없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다른 식인요괴와 다른 점은, 인간을 섭취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점이에요. 애초에 인간이란 건 물고기보다 맛이 없다구요. 뭐, 인간의 고기가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먹은 지 천 년도 더 되었을지도 몰라요. 안 됐을지도 모르고. …미안해요, 사실 너무너무 오래 살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카오루도 알고있죠? 오래 전부터 인간들이 천사, 악마, 인어 세 종족을 신처럼 여기며 제멋대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는 건. 애초에 인신공양이란 우리가 식인요괴니까 시작된 풍습이에요. 아무 인간이나 바치는 건 안 돼요.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간의 『조건』은 특별하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람들은 그 조건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주로 처녀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를 모르는 미혼의 여성을요. 요괴 중에는 인간처녀를 신부감으로 원하는 녀석도 있다고 하던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매급으로 묶인 거겠죠. 너무한 처사에요. 어차피 『번식』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먹지 않고 돌려보내니 제물이 신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해서 기껏 살려 보낸 사람을 불길하다고 죽여버리더군요.

그는 불만스러운 투로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다. 천 년 전이라니 확실히 옛날옛적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다. 인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문자가 없던 시대의 벽화라고 한다. 천 년도 우스울 정도의 옛날 옛적부터 인어는 존재했던 것이다. 그 인어가, 바로 눈 앞의, 언뜻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해사한 청년이고, 이 청년이 사실은 식인요괴라는 사실에…… 속이 울렁거린다. 카오루는 입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감싸며 굳었지만 신카이는 그를 곁눈질 할 뿐 혼자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산이나 동굴에 바치는 다른 제물들과 달리, 바다에 바친 제물들은 제게 도착할 즈음엔 대개 『익사체』였어요. 시체를 돌려주어봤자 장례를 치뤄줄 것 같지도 않고, 그들을 먹을 필요성 역시 느끼지 못해서 그들에게 새 삶을 주었어요. 반디오징어, 호롱아귀, 마귀상어, 여러 바다 생물로,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저기 보이나요? 이 동굴 주변을 유영하는 저 범고래. 저 아이는 제게 마지막으로 공양되었던 아이에요. 전 시간을 헤아리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물고기들은 그게 이백 년쯤은 되었을 거라더군요. 종종 여자가 아니라 어린 남자아이가 오는 경우도 있는데, 저 애가 그랬어요. 여기까지 오면 보통 퉁퉁 불은 익사체가 되기 마련인데, 그는 방금 숨을 거둔 것처럼 아주 깨끗했어요. 잠든 것처럼 혈색도 고왔죠. 범고래로 되살렸지만, 인간일 적의 몸이 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으로도 변할 수 있답니다. 총명하고, 상냥한 아이로 자라주었죠.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진짜 중요한 얘길 해줘.”

입술을 말아물고 있던 카오루가 각오한 얼굴로 말문을 뗐다. 카나타는 손가락 하나로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였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가치는 누구나 다르답니다. 인간들은 종종 욕구에 의한 것을 중대하다고 착각하죠.”
“궤변이네. 내가 알아야 할 건 백년이 무엇인지, 그리고 제물의 조건이 뭔지 뿐이야.”
“……카오루는 꽤 성미가 급하네요. 지금 막 설명할 참이었답니다? 사실 지금까지 공양된 인간 중 『조건』을 충족하는 대상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굳이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먹을 생각이 없기도 했고, 죽어버린 이상 의미가 없었거든요.”

“……”
“진정한 『공양』은 『백년』 뿐. 그 외에는 다 가짜 공양. 인간들이 만들어낸  『미신』입니다. 『백년』을 하기 위해서는 ‘맛없는 인간’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백년』은 ‘맛없는 인간을 맛있게 『숙성』시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죽은 인간은 안돼요. 죽은 인간은 숙성되는 게 아니라 부패하니까.“


진정한 공양, 백년의 의미. 백년을 위한 제물의 조건. 신카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카오루는 왠지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다 이윽고 기억해냈다. 요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야기라며, 인간에게도 유언비어처럼 퍼진 소문이 있다. 어디까지나 여름철 더위를 가시게 하는 괴담 취급에 불과한 얘기였지만.


세상에는 식인요괴들이 치를 떨 정도로 맛없는 인간이란 게 있다고 해. 혀가 말려버릴 정도로 맛이 없는 데다가 억지로라도 먹었다가는 배앓이를 하다 죽어버릴 정도로 맛없고 독성이 강한 인간이. 하지만 그런 인간을 잘 키우면 (대체 어떻게 잘 키운다는 것일까? 요괴가 인간을 소나 돼지처럼 기를 수 있는 걸까?) 천상의 맛으로 변한대. 식인요괴들은 살아있는 동안 그 산해진미를 너무너무 먹고싶어 한다는 거야. 그래서 맛없는 인간을 만나면, 식인요괴들끼리는 서로 엄청나게 싸우기도 한대. 왜, 가족이 몰살당했지만 마침 나무를 하러 가서 생존했다던 옆 마을 사람있잖아. 그 사람도 사실은 맛없는 인간이라서 살아남은 거래.


그 괴담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물고기보다 맛이 없다고 그랬지.”

중얼거린 카오루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맛이 있다면’ 눈 앞의 이 인어는 인간을 기꺼이 먹어치우는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눈물이 흐른다. 뭐가 ‘신’이란 말이야. 그래봤자 요괴인데, 뭐가 신비한 전설의 생물이란 말이야. 신카이의 여상한 태도는 아이의 눈물 앞에서 조금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반응 앞에 신카이는 눈을 자주 깜빡이다가 뒤늦게 눈물을 닦아주려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카오루는 그 손을 거부했다. 제 눈물을 핥고 ‘쓰다’며 묘하게 기뻐했던 얼굴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다. 배신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맛있어질 거니까 먹고싶단 거네.”
“네?”
“그걸 백년이라고 부르는지는 몰랐어. 다른 식인요괴들이 떠들어대서, 인간들한테도 소문처럼 퍼졌어. 설마 진짠 줄은 몰랐지만. ‘맛없는 인간을 잘 키우면 아주 맛있어진다’. 그래, 내가 그 백년의 적합자란 거지.”

줄곧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지만, 신카이는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다른 식인요괴들이 그렇게 떠들던가요? 이상하네요. 백년의 풍습은 원래 세 불사不死만이 아는 건데.”
“어쨌든 당신은 날 먹고 싶단 거잖아.”
“……맞아요. 당신을 먹고 싶어요. 그러니 카오루, 저와 백년을 하겠어요?”

신카이는 또박또박, 다시 물었다. 홧김에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지만, 신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백년은 진심을 담은 수락이 필요하다며. 웃기는 소리였다. 누가 진심으로 자길 먹어도 좋다고 수락한단 말인가. 신카이는 조건을 덧붙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백년은 지상에서 하도록 해요. 인간은 압박에 약하다고 하니까, 당신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편이 낫겠죠.”

공손한 말투로 이 남자는 무얼 말하는지. 지독한 협박이었다. 카오루를 인질로, 카오루를 원하고 있다. 자신을 먹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흔들림 없는 단정한 얼굴. 뼈저리게 느꼈다. 이 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자신과 전혀 별격의 생물이라는 걸.

인어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여유로움마저도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카오루가 아무리 냉담한 반응을 보여도 인어는 한결같이 카오루를 대했다. 아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정성스러운 태도로. 그의 몸을 상하지 않도록 살뜰히 살폈고 매일, 비록 해산물 뿐이긴 했지만 분주하게 재료를 구해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대접했다. 자신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 꽤나 애쓴다고 빈정댔지만, 어렴풋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인어는, 백년에 대한 갈망과는 별개로 분명 매사에 하카제 카오루란 인간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오루는 자신이 백년을 수락하지 않은 채로 이 물의 감옥에서 스스로 벗어나 저 심해에 몸을 던진다고 해도, 인어가 다시 또 자신을 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친 폭풍우에 휘말린 저를 살렸던 것처럼.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마음 속의 진실한 외침을 무시하며 애써 자기자신에게 속삭인다. 어차피 저 인어는 백년을 위해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지.

카오루는 물의 표면에 손을 가져다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에서 팔을 타고 흘렀다. 그 상태에서 카오루는 크게 외쳤다. 아무 말이나 지껄여보았다. 소리는 반사되지 않고 물에 흡수되어, 외침이 멎은 해저 동굴은 그저 잠잠했다. 문득 더없이 쓸쓸해졌다. 그 순간 심해의 저편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빛은 점점 카오루에게 가까워져, 인어의 형태가 되었고 인어의 꼬리는 두 다리로 갈라져 인어는 인간이 되었다. 다리로 땅을 딛는 순간 그는 아픈 표정을 지었지만, 곧 카오루를 보고 미소 지었다. 무엇을 먹고 싶어할지 몰라서, 제철 생선을 전부 데려왔다며 발랄하게 말하는 인어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바다처럼 서늘하지만 닿노라면 자신의 온기로 서서히 물드는 피부.


“카오루?”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이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름을 알려주지 말 걸 그랬어. 교활한 인어 같으니.

“해. 그 백년이라는 거, 하자구.”

이번에는 눈물을 닦아주는 인어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