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甘美로운 꿈.>
감미로운 꿈.
철 지난 화이트데이 연성
하카제 카오루 X 신카이 카나타
※임신소재 있음※
카오루는 모래알을 세고 있었다. 바다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 파도의 유혹을 느끼며 모래를 한 알 한 알 세어가고 있을 때, 얕은 모래의 둔덕 너머에 신카이 카나타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웬일로 바닷물 속이 아니라 모래 위에 누워있네.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모래를 세는 이 영문 모를 행위는 목소리를 돌려받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카오루는 낭패를 느끼며 카나타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이를 크게 해보아도 모래는 모든 소리를 흡수했다. 더욱이 맨발이었다. 이대로 깜짝 놀래켜 볼까, 장난스럽게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설 수록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파도소리 뿐이었던 백사장에 앓는 소리가 끊기는 음절로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카오루는 초조한 마음에 뜀박질을 시작했지만 모래는 너무 부드럽고, 얕고 촘촘한 공동空洞들이 깔려있는 것처럼 푹푹 발이 빠져서 해가 떨어지고 가장 긴 석양이 그들을 붉게 감쌀 즈음에야 카나타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저기 카나타 군, 속으로 애타게 부르면 들릴 리 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등 돌린 카나타가 몸을 살짝 젖혀 시선을 카오루에게 향했다. 땀과 눈물로 젖은 얼굴, 찡그린 눈가, 뜯어문 듯 핏기가 고인 잇자국이 남은 입술. 카오루는 몸을 숙이고 무릎 걸음으로 카나타의 옆에 바싹 다가섰다. 카나타는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산통에 시달렸는지 온 몸이 창백하고 땀에 젖은 이마가 서늘했다. 그의 다리 사이로는 길고 긴 산통의 결과물인 듯 둥근 덩어리들이 뭉근하게 쌓여있었다. 카오루는 차마 희게 뻗은 그의 맨다리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서둘러 얼마 없는 제 옷으로 카나타의 하반신을 덮었다. 배가 부푼 정도를 보아하니 출산은 아직 끝나지 않을 양 싶었다. 얇은 와이셔츠 아래로 투명한 빛의 둥근 알들이 모래 위로 투둑투둑 떨어졌다. 그는 산란하고 있었다. 태아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알을 낳는 게 과연 카나타 군답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어떻게 출산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발생 중인 일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무의미했고, 무엇보다 머리 한 구석에는 카나타 군은 흰동가리와 비슷한 거였는지도 모르지, 하고 납득하는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임신시켰단 말인가?
카오루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부푼 배를 만졌다. 카나타의 희고 부푼 배를 노려보는 카오루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임부의 배에 얹은 손바닥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카나타가 숨을 삼키며 긴장하고 그 긴장이 카오루의 손끝으로도 전해졌다.
“카오루, 흐, 카오, 루……”
애원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카오루는 손바닥에서 천천히 힘을 빼었다. 카나타 군. 숨,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카오루는 눈을 감고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평소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로 돌아오자. 나로 인한 잉태가 아니라면 차라리 유산해버렸으면, 하고 순간 생각해 버렸지만. 그런 생각은 내 캐릭터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 않은 척 뚝 시치미를 떼고. 카오루는 카나타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그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카나타의 배에서 손을 떼고 대신 창백한 손을 쥐자 강한 힘으로 마주 잡아온다. 그의 몸이 가볍게 튀고 떨리며 이윽고 남은 것들을 마저 출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내는 것이 느껴졌다.
피와 양수, 바다처럼 비린내가 난다. 생물의 기원은 바다라는 설이 있다. 탄생의 순간은 언제나 비릿한 것인지도 모른다. 카오루는 제 앞으로까지 굴러 온 알을 저도 모르게 주워올렸다. 그것은 카오루의 검지손가락 한마디는 넘고 두마디보다는 작은 크기로, 생물의 출산에 대해 큰 지식이 없는 그가 보기에도 모체에 비해 너무나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양수와 뒤엉켜서 끈적한 촉감이었지만 표면만큼은 반질반질하고 매끄럽게 반짝였다. 우유처럼 투명하고 뽀얀 표면이 낙조落照에 물들어 옅은 분홍빛을 띠었다. 단단한 투명함. 그것은 알이 아니라 진주였다. 이토록 커다란 진주는 조개가 살을 도려내는 어떤 고통을 참아도 형성하기 힘들 것이다. 카오루는 문득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카나타의 노력임을 깨달았다. 카오루는 홀린 것처럼 진주를 입으로 가져가, 주저없이 머금었다. 입 안에서 진주 표면의 점액질이 침과 섞여 점점 희석되어 묽어지는가 싶더니 진주 표면을 혓바닥으로 굴리자 사르르 녹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에 넣고 굴려보니 그것은 진주가 아니라 사탕이었다.
“달아……” 그게 목소리를 돌려 받은 카오루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중얼거린 말이기도 했다. 눈 앞에는 입안에 넣고 굴린 뽀얀 사탕보다 더 새콤할 것 같은 옥색의 사탕이 있었다. 욕심쟁이 아이처럼 그 사탕에도 마저 손을 뻗자 그것은 순식간에 깜빡이며 사라졌다.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리니 그것은 사탕이 아니라 카나타의 눈동자였고, 자신은 카나타의 눈꺼풀과 점막을 찌른 것이었다.
“아픕니다, 카오루.”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린 카나타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픈 것은 『나쁘』다구요?”
저는 추워보이는 카오루를 위해 이불까지 덮어주었는데… 『너무』하네요. 투덜투덜거리는 카나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드디어 정신이 든 카오루는 확 몸을 일으켰다. 카오루의 얼굴은 어느새 이마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이상을 알아챈 카나타가 가볍게 찔린 거라 이미 괜찮아졌는지, 눈에서 손을 떼며(그래도 여전히 왼쪽 눈이 옅게 충혈되어 있긴 했다) 카오루? 다시 그를 불렀다. 카오루가 힐끗 바라보자 카나타의 배는, 와이셔츠에 가려져있긴 했지만 충분히 홀쭉해서 무언가를 임신하긴 커녕 과식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야 신카이 카나타는 임신할 수 없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꿈을.
“아니,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줄래……”
허탈한 기분으로 카오루는 이불로 덮인 무릎에 고개를 떨구었다. 사타구니 사이에 느껴지는 이 갑갑함은, 이불을 걷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카오루는 자신의 부푼 하반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당장에 시끄러운 클래스메이트와 까탈스러운 클래스메이트, 두 사람 정도만 떠올리자마자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하반신도 냉정해졌다. 남자를 떠올린다면, 이게 너무나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애초에 평소에 남자에 대해 생각할 겨를 같은 게 있을 리가. 예외가 있다면 제 옆에서 순진무구하게, 하지만 조금 걱정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갸웃하는 해양생물부의 부장 뿐. 순수한 호의였겠지만 카나타 군이 이불을 덮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발기한 걸 들켰더라면 옆 반의 요란한 연극부 부장처럼 당장에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3층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한 그쪽과 달리 자신은 그럴 자신이 전혀 없지만.
카나타는 카오루가 꾸었던 꿈에 나온 장본인으로,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발칙한 내용을 떠올리게 하니까 최대한 말을 섞지 않고 돌아가는 게 좋겠지만, 주인이 장난감을 던져주길 바라는 강아지마냥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카오루를 바라보고 있다. 이럴 때 완전히 상대를 무시할 수 없는 점이 자신의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는 귀여운 여자애도 아닌데….
“……그런데, 카나타 군이 들고 있는 그건 뭐야?”
카오루는 최대한 카나타의 얼굴에 눈을 돌리지 않으며 물었다. 하지만 왜일까, 보지 않아도 그가 저를 향해 함박 웃음을 짓는 것이 느껴진다. 물어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소중히 안고 있던 것을 냉큼 카오루에게 내민다.
“『사탕』이랍니다……♪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카오루에게도 줄게요♬”
유리병. 각양각색 탐스러운 색으로 알알이 빛나는 사탕이 가득 담긴. 카오루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화이트데이는 어제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어제의 카오루는 해양생물부에 들리지 않았다. 카나타는 어제도 이 사탕을 들고 카오루를 기다렸을까?
“발렌타인데이 때 뭘 준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우정』사탕이에요~♪”
카나타는 그렇게 말하며 뚜껑을 열고, 사탕 하나를 카오루의 입술에 내민다. 불투명한 연분홍색 사탕. 왜 하필 이 색인 건데……. 다시금 꿈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빛깔에 읏, 카오루는 싫은 표정을 짓지만, 입술 위를 꾸욱 누르는 단단한 과육菓肉의 촉감에 겨우 입을 벌리면, 잇새를 비집고 침범하여 혀끝에 퍼지는 향기로운 설탕의 맛. 카나타의 사탕은 꿈 속에처럼 달콤하고 비린 맛이 났다. “달아…….”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면, 문득 귓가에 소라껍데기를 가져다 댄 것처럼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 그곳에서 발생한 카나타의 잉태. 는 정말 꿈이었을까? 시선을 돌리면 아직 광택을 갖지 못한 원석처럼 사탕들이 알알이 유리 너머에서 반짝이고 있다.
끝.